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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보

놀라운 문화유적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 '남한산성'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에서부터 수어장대, 침괘정, 연무관 등의 군사시설, 그리고 망월사, 개원사, 장
경사, 숭렬전, 현절사 등의 사찰과 사당까지, 많은 유적이 있는 국가사적(제57호) 남한산성. 스쳐 지날 때는
몰랐던, 놀라운 문화유적들이 구석구석에 있다.

남한산성 행궁(국가 사적 제480호)

행궁이란 도성 안의 궁궐이 아니라 임금이 도성 밖으로 멀리 행차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을 말한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고 불렀다.
1624년(인조 2년) 쌓기 시작하여 1626년에 완공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와 사직을 위한 건물까지 갖추고 있다.

행궁 내 반석

행궁 상궐 뒤편 바위에는 반석磐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위기에 처한 나라를 튼튼히 지켜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특이한 점은 ‘반磐’자는 지금 쓰이는 글자와 조금 다른 모습이고 ‘석石’자 가운데에는 점을 찍어 의미를 강조하였다.

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 장대 중 하나로 병력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용 누각이다.
1624년(인조 2년) 단층으로 축조한 것을 1751 년(영조 27년)에 2층으로 증축했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건물 안쪽에 걸린 ‘무망루’라는 현판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북벌에 실패하고 죽은 효종의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붙인 이름이다.

숭렬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1638년(인조 16년)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위패를 모시고 있다.
1795년(정조 19년)에 정조가 ‘숭렬’이라 사액(임금이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 내려 보낸 것)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함께 있게 해달라고 해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 이서를 함께 모시게 했다고 전해진다.

청량당(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은 성을 쌓은 팔도 도총섭 벽암 각성대사,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이회와 그 부인의 위패를 함께 모신 사당으로 수어장대 옆에 세워졌다.

안쪽 정면에 이회의 영정(초상화)이 있고 그 양옆으로 처첩(부인과 소실)과 벽암대사의 영정이 있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청량산의 이름을 딴 것으로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현절사(경기도 유형문
화재 제4호)


현절사는 병자호란 후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삼학사는 남한산성이 청 태종의 12만 대군에 완전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들이다.
후에 좌의정 김상헌, 이조 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배향됐다.

현절사는 1688년(숙종 14년)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년 봄에 사액하였다.
선비 정신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침괘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정확한 건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발견당시 주춧돌이 견고하고, 방의 온돌이 상하지 않았고 방 하나의 온돌 높이가 수척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시험 삼아 방에 불을 때보니 따뜻해졌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751년(영조 27년)에 고친 것이다.
건물 오른쪽에 병기를 보관해두는 창고가 있어, 무기고나 무기 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주민들 간에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는 설이 전해지나 이를 고증할 자료는 없다.

연무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성을 수비하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연무당’으로 부르던 것을 숙종때 ‘연병관’이라 쓴 현판을 하사하여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군사들을 훈련하고 무술시합을 열어 뛰어난 인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다고 한다.

지수당(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4호)

1672년(현종 13년) 이세화(1630-1701)가 지은 건물로 당시 고관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건립 당시에는 정자 앞뒤로 세 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두 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지수당이 자리하고 있는 연못 옆에 있는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정자의 남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성을 관류하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옹성

옹성은 성문 보호를 위해 성문 밖에 둘러싼 이중 성벽이다.
본성에 대한 외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고 성문을 가리는 일차적 방어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옹성이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총 5개가 있다.
다른 곳에 비해 남쪽은 경사가 완만해 방어력 보강 차원에서 가장 많은 옹성이 설치됐다.
제2 남옹성은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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