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93주년 3.1절 기념일 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1910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으며 토지 조사 사업의 실시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면서 삶은 더욱 더 피폐해져갔습니다
그건 을사늑약때부터 시작된 민족 해방 의지가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면서 세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킬때 우리나라 또한 그 영향으로 독립의 의지를 다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퇴임했던 고종이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며 1910년 갑작스런 사망에 이르자 항일구국운동 독립투쟁의 모습으로 3,1운동에 발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93년전 우리나라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천도계, 기독교계, 불교계등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한 독립선언은 고종의 장례일인 3월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안주, 의주, 원산 등지에서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지면서 전국적인 민족해방 운동으로 전개 되어갔습니다.
그 당시 너무도 참혹한 역사를 안게된 마을이 있었으니.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였습니다.3.1절을 며칠 앞둔 주말 아이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갔습니다.
그 옛날의 시리고 고통스러웠던 아픔만큼이나 날씨가 많이도 추웠던 날로 3,1운동 순국기념관에 앞서 그 초입에서 우린 3.1 운동 순국 기념탑을 먼저 만났답니다.
1919년 4월 15일 갑자기 마을을 습격한 일본인들은 23명의 주민을 강제로 예배당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지르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렇게 23명의 목숨을 앗은 후 한줌의 잿더미로 화한 교회당 자리에 세워진것이 바로 이 기념비 였습니다.
2001년 3월 1일 개관한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이 고장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바르게 기리는 동시에 지역주민들의 자긍심 발로는 물론 역사의 현장 학습공간으로서 애국애족의 장이 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암리 사건뿐만 아니라 당시의 3.1운동 정신과 수원·화성지역 주민들의 독립 만세운동 참여 상황을 널리 알림으로써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넋을 숭앙하고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대내외에 널리 홍보함을 목적으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만을 생각하고 왔다가는 제법 큰 규모의 기념관이 있다라는 사실에 고무되었으니 잊지 않고, 잊혀지지 않고, 이렇게 그 아픈 역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다행 스럽기까지 했습니다. ( 이 마을 사람들에겐 당시의 사건은 영원히 지울수 없는 아픔일터이지요) 올때까지만 해도 3,1운동 순국지역으로 알고 있을뿐 자세한 내막은 알지못했던 아이들은 입구에 자리한 3,1운동 당시의 모습과 순국기념관의 배경설명을 만나면서야 상상할 수 없었던 크나큰 고통의 장소였음을 알면서 놀라워합니다.그건 자세한 내막을 모르긴 매 한가지였던 어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
고요한 마을 제암리에 갑자기 찾아든 악몽은 마을의 흔적들을 지워버렸으니 기념관은 당시의 모습을 고증하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들이 이어지면 당시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지요. 제암리 학살사건을 중심으로 진상과 증언자들의 이야기, 발굴을 통해 드러나 일제 만행의 흔적들 , 당시 외국에서 보여주었던 반응들과 속죄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까지 다양한 스케치 였습니다.우리의 마음은 물론이요, 외국인들까지 아파했던 당시의 모습은 바라보는 마음 조차 힘들었습니다.
비극의 시작은 3월 31일 발안 장날을 기해 수천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제암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주민의 주도적 역활로 이루어졌고 그 후 지속적으로 야간 햇불시위를 준비하여 4월1일 남포등을 들고 지내산으로 올라가 벌였던 만세시위였습니다.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가 3.1독립운동 다시 제암리에 살다가 발안으로 이사한 순사보 조희창에 의해 일본경찰에 그대로 보고되어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3일 화수리 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은 주요경계대상 지역으로 지목되었고 이들의 검거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제암리 사건으로 3.1독립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전 제암리에서 형성된 기독교와 천도교과 수원 화성지역의 민족운동세력과 제휴하여 만세시위를 모의하여 학생, 상인, 농민, 노동자등 일반시민과 함께 이 지역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면서 이 지역 민족운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 천도교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제암리 교회에 이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감행했던 것이었지요.
기념관에서는 제암리 이외 경기지역에서 일어나 3.1독립운동과 1910년대의 독립운동 관계연표등 미쳐 헤아려 보지못했돈 3.1운동사를 자세히 만날수도 있었으며 3.1운동때 평화적 항쟁을 선언하며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모습도 확인 할수가 있었습니다.또한 그렇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3,.1운동은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른 후 결국 실패에 이르렀고 그 후로는 일본군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해외로 나가기에 이르지요.
그렇게 해외활동으로 변해간 우리의 독립투쟁사와 임시정부의 외교활동도도 만납니다.
전시관에서 3.1운동의 의미와 제암리의 슬픔을 마주 한후 23인 순국묘지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제암리 교회에서 너무나 아픔 죽음을 맞이했던 제암리 주민 23분의 합장묘소로 1982년 발굴작업을 시작으로 위령제 후 뒤늦게나마 편안히 잠든 모습이었지요. 그 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립니다.
이 곳이 바로 1919년 4월 15일 23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33채의 집이 사라졌었던 비극의 장소였나 봅니다.
이번엔 3.1운동 순국기념관 2층에 위치해 있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만날수 있지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념관 오른편으로 1995년에 조성된 23인 상징 조각물인 자유롭게 저 ! 하늘이가 보이네요
23개의 크고 작은 돌기둥이 순국선열들의 혼을 담은 추모비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미래 세계를 상징한다라고 하네요.
저 높은 곳에서나 변하고있는 조국 산천을 내려다보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역사를 마주할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좋은일이 아닌 너무도 아팠던 과거인만큼 아이들과 함께 이런 곳을 찾을때면 무조건 적대시하는 마음을 어떻게 승화시켜야 하는걸까 고민스럽기만 한데요. 그 첫번째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는것이다 싶어집니다.
남들은 알고 있는데 나는 모르는 역사가 가장 슬픈일일 테니까요. 그 다음이 제대로 된 시선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겠지요.
93년전 온 나라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날을 기억하며 마음이 좀 더 숭고해지는 3.1절 입니다.
글. 사진 이민숙(블로그기자단 두공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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