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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보

백제의 수도 ‘부여’주요 관광지 탐방!

 

부여는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백제의 수도였던 곳임을 안다. 금강의 하류, 충청남도의 군 소재지로 알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다. 


부여는 이웃 도시 공주와 함께 백제문화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불교유적들과  왕릉 유적, 그리고 궁남지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지역적으로 왕래하기가 먼 까닭에 교과서 속의 이미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좋은 기회로 이번에 부여를 다녀오면서 바쁜 생활 속에서 한적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참 여행하기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느낌을 고스란히 담은 사진과 함께 부여의 주요 관광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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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정림사지

 

‘백제에는 사탑이 매우 많다’는 기록을 증명하듯 부여 일대에는 20여 곳에 이르는 백제시대 절터가 분포하니 사비시기의 부여는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1935년 군수리 절터에서 시작된 백제의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의 성과는 백제불교의 모습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최근 몇 년간 부여와 익산지역에서 거둔 중요한 발견은 백제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림사 터는 중문, 석탑,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고 주위를 회랑이 감싸는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으로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9호)과 고려시대 석불좌상(보물 108호)1구가 남아있다. 1942년과 1943년에 후지사와에 의하여 실시된 1차발굴조사 결과, 남향한 1탑1금당식의 전형적인 백제의 사찰임이 밝혀진 바 있다.


주요 출토 유물은 활석제삼존불편, 각종 소조상 및 도제벼루를 포함한 각종 토기인데, 소조상 일부는 중국 북위 낙양 영녕사 출토품과 유사하여 북조와의 문화교류의 단면을 보여준다.

 

 궁남지


백제 말기인 634년에 왕궁의 남쪽 별궁에 만든 연못이다. 삼국사기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만들어 이십여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왔으며,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신선이 놀던 산을 본땄다” “왕이 비빈과 함께 큰 연못에서 배를 탔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과 관련된 연못으로 보인다.

 

                   

 

만들 때의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지금의 모습은 1965년 복원되어 작아진 것이다. 두차례의 발굴조사에서 원래의 연못 가장자리 일부와 백제시대의 논 일부와 도랑의 흔적도 확인 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연꽃무늬전돌, 목각새, 토기류 등이 있다. 사적 제 135호이다. 연꽃이 만발한 7월이면 부여 서동 연꽃 축제가 열린다.

 

 마곡사


마곡사는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있으며, 태화산의 지맥에 의해 둘러 쌓인 명승지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의 대표적 고찰이다. 국사봉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내려온 마곡천의 상류가 계곡사이에서 동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바꾸며 돌아가고 있는 우회지역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산수가 겸비된 승지로 이름 높다. 특히 이곳의 산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 정감록 등의 자료에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빼어난 자연환경 못지 않게 마곡사는 오랫동안 이 지역 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온 거찰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사찰의 규모 뿐만 아니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 등의 여러 측면에서 이 지역 최고의 사세를 갖춘 곳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전국 사찰의 사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곡사는 충청남도 지역을 총 관장하는 사찰로서의 위상을 부여받게된다.

 

1902년 당시 궁내부 소속으로 사사관리서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서 마련한 ‘대한사찰령’에 의해 전국 16개 중법산 사찰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당시 충처청북도지역에서는 법주사가 중법산 사찰이 되었으며 충청남도지역에서는 이곳 마곡사가 유일하게 지정되었다. 이러한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30본말사법에 의한 30본산(뒤에 31본산으로 늘어남)의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도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로서 인근 지역의 상당수 사암을 관장하는 위상을 간직하고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


뒤편에 있는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금당으로서, 경내의 전체 가람 배치상으로는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상에 놓여 가장 중심 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수 없으나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시대 말인 1813년(순조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다포식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이며 쇠서는 끝이 날카롭게 위로 뻗쳐 있고 그 위에 연봉이 장식되었으며, 봉황머리의 운공도 첨가되었다. 앞면의 3분합문에서는 꽃모양의 장식이 가미되고, 내부도 2간의 유물천장에 연화문, 운학문이 그려져있다.

 

그리고 불상 위에는 섬세한 조각의 닫집이 있어 공간구성을 한층 풍성하게 해 준다. 앞면 어칸 기중머리의 용머리 조각은 내부의 화려한 구성과 함께 건물 전체를 풍만한 장식으로 가득 채워준다. 양식적으로 볼 때 장식적 특징을 잘 살린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1984년 11월 보물 제 802호로 지정되었다.

 

마곡사 오층석탑


이 탑은 방형의 기단 위에 상륜부가 라마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 특수한 모양으로, 중국 원의 영향을 받은 고려 말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전세계에서 3기밖에 없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이 탑은 조선시대 중기 1592년의 임진왜란 때 무너져 그 속의 귀중품은 당시에 없어졌다. 1984년 11월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었다.

 

 무량사

 

무량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43번지 만수산 남쪽기슭에 다리한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부여에서 대천 간 도로를 따라 만수리에 이르는 절 입구가 나온다. 여기에서 약 2km거리에 무량사가 위치한다.

 

절은 만수리에서 북으로 길게 뻗은 계곡 사이의 서쪽에 표고 570m의 만수산에 둘러 쌓여있으며, 절이 위치한 곳은 계곡 내의 서쪽으로 비교적 넓게 평지가 형성된 곳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무량사는 신라말 사굴산문을 개창한 통효국사 범일이 차창건하였으며, 무주 무염이 한때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뒷받침해 줄만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1997녀녀 무렵 천불전과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무량사가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남긴 것은 조선초 이후이다. 김시습이 절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입적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무렵인 연산군 중종대에 법계성풍수륙승회수재의궤, 몽산화상육도보설, 지장보살본원경 등 경판이 제작되었다. 조선 중엽에는 고승 진묵 일옥이 무량사에 한때 머물렀다. 동사열전에 의하면 1622년(광해군 14) 불상을 조성하고 진묵 선사가 증병법사로 참여하였다.

 

1630년을 전후하여 1636년 인조14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중창불사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이 때 중건된 것이 많다. 한편 무량사는 조선왕조실록에 3건의 관련기사가 찾아지고 있는데, 명종 때 절의 지음승이 고을 현감에게 억압받았던 사실, 1596년 (선조29) 이몽학의 난때 그 무대가 되었다는 것 1597년(선조30) 왜적의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 등이다. 말사로는 내원암, 보현암, 도솔암, 태조암 등이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오층석탑으로서, 호형을 이루는 매우 넓은 기단 면석을 중심으로 상하에 낮은 몰딩을 갖추고 있다. 탑신부는 낮고 옥개석이 얇고 넓어 전체적으로 체감 비휼이 우아하며 매우 장중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원형 앙화가 남아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츠층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보이는 이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3년 보물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7.5m이다. 탑 해체 공사때 초층 탑신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등 삼존상과, 3층 석탑에서 금동보살상, 그리고 5층 탑신에서 사리구 일괄이 출토된 바 있다. 출토된 불상 중 아미타불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의 좌상으로 조형되었으며 높이 33.5m이다.


좌협시보살인 관음보살상은 본존인 아미타불과 같은 자태를 지니고 있으며, 머리는 높은 보관으로 장식되었다. 높이는 25.9m이다. 지장보살상은 대부문 모습이 관음보살과 비슷하나 수인의 위치만 반대로 되어 있으며,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높이는 25m이다. 3층 탑신의 보살좌상은 앉은 높이 35.2m로 보관 및 두손이 결실되었고, 뒷면 하체 일부도 깨어진 채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1983년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 100호로 지정되었다.

 

 우담바라


산스크리트 우둠바라(udumbara)의 음역. 우담화(優曇華)라고 써서 우담바라의 꽃을 뜻하기도 한다. 불교의 경전에는 '우담바라'가 3000년에 한번씩 피어나는 꽃으로, 석가여래나 지혜의 왕 전륜성왕(轉輪聖王)과 함께 나타난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우담바라는 흔히 '부처님을 의미하는 상상의 꽃'이라 하여 상서로운 징조로 받아들여왔으며, 아주 드문 일을 비유하기도 한다.

       

실제로 인도엔 우담바라란 이름을 지닌 나무가 있다. 뽕나무과의 교목인 무화과 속에 딸린 한 종이다. 남방의 따뜻한 기온에서 자라는 활엽수로서 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은화식물인데 꽃이 보이지 않는 건 항아리 모양의 꽃 받침에 가려 있어서다.

 

인도에서는 옛부터 우담바라와 함께 보리수를 신성한 나무로 쳤다. 한편, 학계에서는 '우담바라'라고 불리는 꽃은 사실 '풀잠자리 알'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글,사진 │ 6기 통신원 전소정